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 인민지원군 (문단 편집) === 역대 사령관 === 펑더화이는 전쟁이 끝날대까지 사령관직함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펑더화이가 귀국한 1952년 4월부터는 사령관 대리인 천겅과 덩화가 각각 지휘했다. 초기 제정러시아군 출신들이 지휘부를 이루었던 소련군과는 달리 중국군의 지휘부는 홍군시절부터 골수 공산당원들이 많았기 때문에 역대 사령관은 모두 [[정치장교]]와 겸직이었다. * [[펑더화이]] (1950.10~1952.4) (1955년 당시계급 원수)[* 한국전쟁 참전 당시 중국군은 직책만 있고 계급은 없었다.] (1898~1974)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General_Peng_Dehuai.jpg]] 펑더화이는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을 저지하는 군공을 세웠으나, 미국의 압도적 공중우세로 인한 보급 차질로 불필요한 인명피해가 생기는 중공군의 열악한 현실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전쟁중에도 수차례 베이징을 방문하여 "우리 군대의 보급사정이 너무 나쁘다. 좀 더 보급에 신경써달라"고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와 싸웠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장비나 화력보다는 병사 개개인의 사상의 각성을 중시한 마오쩌둥의 군사이론에 회의를 갖게 되었고, 한국전쟁 직후 임명된 국방부장 시절 미군과 같이 첨단무기와 프로페셔널한 전문군인을 갖춘 인민해방군을 양성하려 했다. 하지만 이는 마오쩌둥의 의심을 샀고 결국 [[1959년 루산회의]](庐山会议)에서 [[대약진운동]] 실패를 두고 마오쩌둥에 항의했다는 이유로 실각한다. 한국전쟁이 마무리되지 않았던 1952년 머리에 종양이 생겨 중국으로 귀국했지만,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의 직함은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휴전협정에는 중국측 대표로 서명하게 되었다. * [[천겅]] 陳賡 (1952.4~1952.6) (1955년 당시계급 대장)[* 이 계급은 한국의 대장보다 높은 계급으로 간주한다. 상급대장에 해당.] (1903~196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Chen_geng1.jpg]] [[황포군관학교]] 1기 출신으로, 교장 [[장제스]]가 매우 아끼던 인재였지만, 공산주의에 투신하여 스승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원래 야전지휘보다는 공산당의 공작이나 방첩 계통을 맡아보았으나 야전지휘에도 재능이 있었는지, 항일전과 국공내전에서 공훈을 세웠다. 펑더화이가 귀국하자 사령관 대리로 중공군을 지휘했다. 미군의 압도적인 공군-해군력에 대항하기 위해, 땅굴전술을 고안하고, 해안방어를 중시했다. 이후 공병학교장에 임명되어 귀국했고, 국방차관, 부참모장을 맡아보았다. 중국에서 상당히 인기 있는 장성이며 생애가 드라마와 만화책으로도 나올 정도. * [[덩화]] 鄧華 (1952.6~휴전) (1955년 당시계급 상장)[* 한국군의 대장에 상당] (1910~1980)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Denghua1955.jpg]] 성공적으로 전선을 고착시켰고, [[http://www.dmz.go.kr/korean/wantgo/tour_security/view/968|상감령 전투]][* 1952.10월 중국군이 유엔군의 추계공세을 막아낸 전투. 중국측에서는 크게 선전되었고, 영화로도 제작되었지만, 한국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한국군이 대승을 거둔 [[백마고지 전투]]와는 달리, 상감령 전투는 참전한 한국군의 [[흑역사]]이기 때문인지 잘 알려져있지 않다.], [[금성 전투]] 등의 몇몇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문화대혁명]] 전에 사망한 천겅을 제외하고 펑더화이와 덩화는 모두 문화대혁명 시기 엄청난 박해를 당했다. 펑더화이는 홍위병에게 여러차례 두들겨맞았고, 덩화도 군에서 쫓겨나 뉴펑(牛棚)[* 원래는 외양간이라는 뜻이지만,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이 만든 '사설 감옥'을 지칭한다.]에 갇혀 홍위병에게 두들겨 맞다가 1976년에야 풀려난다. 뿐만 아니라 펑더화이와 같이 참전했다는 이유로 다수의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들이 문혁때 감옥에 가거나 박해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연대장급으로 참전한 [[조선족]] [[조남기]] 상장도 마찬가지 신세였다가 후에 풀려났다. 그야말로 목숨걸고 싸운 후에 돌아온 것은[* 제공권 없이 싸우던 중공군은 장성급도 매우 큰 피해를 입어서, 군장(군단장)급이 세명, 사단장급에서 7명의 전사자가 나왔다. 비교적 후방에 위치했던 사령부에서 근무했던 마오쩌둥의 아들인 [[마오안잉]]조차도 전사했을 정도이니.] 가차없는 [[토사구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